너와 내가 만나는 세상, ‘원형의 시간’
김허경(미술학 박사 / 강의교수)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통해 원형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원형의 시간이란 무엇일까?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어느 혹자의 말처럼 매 순간 집중하는 개의 특성을 꼬집어 표현한 말이다. 쿤데라는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인간의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충족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반면 카레닌은 ‘순간’에 집중하며 산다. 책의 내용 중에서 “매일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즐거워했다”라는 문장은 순간이라는 흐름의 연속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즉 삶은 순간의 합이라는 의미에서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순간을 산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조각가 주후식은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는 조물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매일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통해 다양한 개의 입체적인 형상을 빚어내고 있다. 개를 매개로 원형의 시간을 찾아 나선 구도자인 셈이다.
개에 관한 표현방식은 원시미술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 인내, 충성, 충복, 지혜를 상징하였고 때로는 잡귀를 쫓아내고 복을 불러오는 부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반려견으로 지칭된 이후에는 인간 사회의 약자와 강자를 대변하면서 권력 관계를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대상이 되었다. 문학에서도 치열한 삶과 예술의 완성,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는 이외수의 장편 소설 『들개』와 조지 오웰의 우화 『동물농장』, 김훈의 『개』 등 개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풍자화할 만큼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주후식은 언어로 구성된 축약, 암시, 상징으로 처리된 문장들과 달리 순수미술로서 솔직한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다. 네 발을 딛고 우직하게 서 있는 사실적인 형상, 꼬리를 세운 역동적인 자세, 두 발을 곧추세우고 코에 걸친 안경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개의 표정들은 지나칠 만큼 잠잠하다. 그는 인간의 일방적인 인상, 반응 혹은 소외시키고 있을지도 모를 개의 입장을 주지시킬 뿐 아니라 상호작용이 가능한 소통의 채널을 탐색하는데 묵묵히 몰두하고 있다. 위선과 허위가 없는 작가의 표현방식은 세상의 탐욕과 이기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잠시나마 망각하게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층 기저에는 무엇보다 공허한 빈자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인간은 물질문명의 사회, 인간소외의 현상을 경험하는 동안 이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주지하듯이 인간은 온전한 존재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래전부터 가족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반려견은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우리와 교감하며 생활해 왔다. 주후식에게도 개의 모티브는 단순한 표현대상이 아닌 원형의 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유대관계와 상호작용을 인식한 2015년부터 닥스훈트,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 불테리어, 와이마라너, 케리 비글, 달마시안, 풍산개, 진돗개, 한라, 평화, 백두, 금강 등에 이르기까지 반려견뿐 아니라 수렵견, 조렵견, 실용견을 포함하여 300여 점을 제작해 왔다. 작가는 시기별로 재료와 형태의 변화를 시도해 왔는데 테라코타를 시작으로 흙의 색깔이 전해주는 미적 특성을 살려 섬세한 묘사에 치중하거나 한지를 주재료로 다양한 반려견의 표정을 포착해 왔다. 2018년은 우레탄, 수지 도료를 사용한 대형조각을 제작했으며 2021년은 소형입상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견종의 보편적인 속성을 정직하게 정형화할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감정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견종의 보편적인 속성을 정직하게 정형화할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이미지로 의인화함으로써 시각적 호소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견(犬 )을 견(見)하면,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난 특이점이 발견된다. 바로 개의 눈에 인간의 눈동자를 대체하여 삽입했다는 사실이다. 주후식은 왜 시각의 사실성, 정직함의 규범을 거부하고 동물의 눈에 인간의 눈동자를 부합했을까? 개의 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의 눈빛이라는 메타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간에게 버려진 견의 방치, 학대, 도살, 실험행위, 생명경시에 처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인간의 눈동자로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과 동물의 눈동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개의 눈동자는 흰자가 거의 없어서 화나고 약이 오를 때, 기분 좋을 때, 싸워야 할 때도 정확한 심리상태를 가늠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인간은 눈동자만으로도 감추고 있는 모든 욕망을 들키고 만다. 이뿐인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 밖의 외집단을 동물에 가깝다고 비하하거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폄훼한다. 참으로 어리석다.
주후식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 말하는 인간에게 인간과 동물이 결코 분리되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뒤틀린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통찰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인간의 눈동자를 가진 정직한 개의 형상을 통해 인간과 다름없는 감정을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재고한다. 그는 생명 존중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원형의 시간 속에서 견종에 따른 습성과 특성을 포착해 나감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온전한 만남과 회복을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개의 예민한 감정이 입과 꼬리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고 코끝에서 퍼져나가는 개의 표정, 꼬리의 움직임을 강조함으로써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이기심과 자기기만이라는 상반된 경계를 꾸밈없이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권력의 구조화 또는 단순한 가상의 관계에 국한되거나 기발한 상상력과 감수성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사실성의 규범을 준수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견종의 개성과 생김새를 온전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동물도 인간과 동등한 개별 생명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삶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정직함(Integrity)을 의미한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개의 형상 속에서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즉 인간과 동물의 공존, 나아가 인간의 성찰과 자연의 회복을 희망하는 것이다.
주후식과 견은 영원한 동반자로서 ‘너와 내가 만나는 세상’ 즉 원형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단선적으로 흘러서 지금의 뒤에 과거가 있고 지금의 앞에 미래가 있다고 상상하지만 실제로 작업에 몰두하는 순간, 이내 순수한 행복감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빈자리는 개처럼 사는 원형의 시간 속에서 채워질 수 있으며 매 순간에 집중할 때 시공을 초월하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으리라.
작가는 인간이 되돌아갈 수 없는 직선의 시간, 삶과 죽음 사이의 딜레마로 남겨진 순간과 영원, 가벼움과 무거움, 사랑과 욕망, 원본과 복제, 변이와 변종 등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원형의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제 너와 나,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개인전 (총26회)
2023 LOVE Animal / 호서대학교 중앙도서관 학술정보관 갤러리 / 아산 / 한국
2022 동반자 : 러브 애니멀 / Hankyung (한국경제신문사) / 서울 / 한국
2021 상호교감전 / 춘천 강아지숲 박물관 / 춘천 / 한국
COMPANION-동반자 ‘너와 내가 보는 세상’ / 금산갤러리 / 서울 / 한국
그외
2인전
2023 김원근, 주후식 2인전 / 아트스페이스 퀄리아 / 서울 / 한국
2022 주후식, 곽수연 2인전 / gallery EA / 서울 / 한국
2021 조우-주후식, 박준상 2인전 / 무수갤러리 / 서울 / 한국
2020 주후식, 김민경 2인전 / 스페이스 신선 / 서울 / 한국
단체전 및 아트페어 (200여회)
2023 Let’s Play Art /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 서울 / 한국
ONE PICK MARKET / 세종시 조치원문화정원 / 세종 / 한국
<어느날 네게 다가온, 그리고 늘 함께 있었던> / 아르띠앙 서울 / 서울 / 한국
토요일 <토요일, 토요일, 토요일> / gallery 아트 인 동산 / 경기 / 한국
동시대이슈전 <헬로! 펫, 또 하나의 가족> / 성남큐브미술관 / 성남 / 한국
주요소장
환기미술관, 대방건설(주), 해태(주),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전주고궁, 대부도 유리섬술관,
영무파라드 호텔(부산), 원주 연세요양병원 외 다수
슈나우저 (Schnauzer) - 주후식